원자력硏 “방폐장 확보 차질 안 준다”…정작 세부계획 없어
과기부, 파이로-SFR 연계 계획 없이 파이로라도 먼저 하자

원자력연구원(KAERI)의 파이로프로세싱 연구시설 프라이드(PRIDE). 제공=KAERI
원자력연구원(KAERI)의 파이로프로세싱 연구시설 프라이드(PRIDE). 제공=KAERI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로부터 플루토늄을 포함한 핵물질을 추출해 소듐냉각고속로(SFR)에서 소각함으로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부피와 방사성 독성을 저감하는 연계기술을 말한다.

지난해 말 제10회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과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 연구개발 현황 및 향후방안'이라는 제목의 안건이 통과되면서 원자력연구원은 비상이 걸린다.

고준위 방폐물의 직접 처분을 전제로 한 기본계획에는 파이로프로세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작은 데다 파이로프로세싱 연구개발비도 기초기술 확보 차원에서 2025년까지 360억원을 지원받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원자력연구원은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과 방폐장 건설 일정에 파이로프로세싱이 포함되도록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친다. 하지만 베일에 싸인 파이로프로세싱을 연구개발부터 상용화 실증까지 마친다는 구상에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방폐장 확보에 차질 없을 거라더니…무작정 국가계획에 담고 보자는 원자력硏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고준위 방폐물 R&D 로드맵에 파이로프로세싱 연구개발을 담자고 산업통상자원부에 급히 요청했다. 로드맵은 지난해 말 발표된 제2차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에 제시된 방폐장 건설 일정에 맞춰 세부적인 기술개발 일정을 담고 있다.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이 파이로프로세싱 연구개발에 관한 조항을 둔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을 발의한 데 이어 이번에는 과기부가 총대를 멘 셈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원자력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자력계 관계자는 "고준위 방폐장 사업 일정이 가시화되면서 다급해진 원자력연구원이 김영식 의원과 과기부와 합심해 특별법과 국가계획에 파이로프로세싱을 못 박아 두는 작업을 추진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원자력연구원도 정작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 계획이나 일정에 대해선 일절 함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원자력연구원이 밝힌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 일정은 지난 5월 원자력학회 춘계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자료가 유일하다.

이 자료에는 '제2차 고준위 방폐물 관리 기본계획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직접 처분과 파이로 연구를 병행하고, 2038년까지 최종 정책 결정에 필요한 파이로 연구 결과를 제공'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르면 내년 예비타당성조사를 신청하고, 오는 2038년까지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 실증을 마친다는 복안이다.

원자력계 일각에선 기본계획 일정에 지장을 안 준다는 원자력연구원의 입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실현불가능한 일정을 공개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파이로프로세싱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른 미국의 장기동의, 실증시설(핫셀) 건설부지, 소요 예산이 먼저 확보돼야만 예타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예타 통과부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원자력연구원 고위 관계자도 본지와 통화에서 "우선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등에 파이로프로세싱이 들어와야 정부 예타를 포함한 상용화 일정을 수립할 수 있지 않겠냐"고 밝혔다. 지난 5월 공개한 일정을 원자력연구원 스스로 번복한 셈이다. 이를 지켜본 원자력계 관계자는 "기술적·외교적 노력이 필요한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무작정 국가계획에 담으면 순리대로 풀릴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 원자력학회 춘계학술발표회에서 원자력연구원이 공개한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 일정. 출처=원자력학회 자료집
원자력연구원 고위 관계자는 본지와 통화에서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등에 파이로프로세싱이 들어와야 상용화 일정을 수립할 수 있다"며 지난 5월 공개한 일정을 번복했다.       출처=원자력학회 자료집

◆미국 장기 동의부터 핫셀 건설부지, 소요 예산까지…산적한 선결과제

많은 전문가는 원자력연구원 뜻대로 고준위 방폐물 관리정책 등에 파이로프로세싱이 포함되더라도 정부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라는 높은 벽을 통과하는 것부터 쉽지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총사업비 1000억원 이상의 연구개발 사업은 모두 예타 신청 대상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상용화 연구시설과 사용후핵연료 실증 실험에만 약 9500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돼 반드시 정부 예타를 거쳐야 한다.

가장 큰 난관은 이른바 핫셀이라 불리는 상용화 연구시설을 구축할 부지를 찾는 문제다. 핫셀은 사용후핵연료가 실제로 반입되는 만큼 핵물질 반입을 반대하는 지역주민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지자체로선 부담스러운 시설물이다.

현재 대전에 위치한 원자력연구원 본원에는 모의 핵연료를 사용하는 연구시설인 프라이드(PRIDE)가 구축돼 있다. 대전 본원에 사용후핵연료 반입이 금지돼 있으므로 원자력연구원은 또 다른 부지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일각에선 원자력연구원의 경주 분원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정작 경주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할 당시 사용후핵연료 관련 시설은 일체 들이지 않도록 특별법에 못을 박았고, 문무대왕과학연구소 예타사업에도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 연구시설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에 지난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한국은 파이로프로세싱 전체 공정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상용화에 착수할 수 있다. 현재로선 핵물질 회수 바로 직전 단계까지만 미국의 동의를 얻은 상태다. 회수 이후 단계는 핵 비확산 원칙을 앞세우는 미국의 강경한 기조 때문에 협상이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한미 양국은 고연소도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파이로프로세싱 연구를 추가 수행하는 데 합의했다. 이 때문에 적어도 고연소도 연구를 끝내야 한미 양국 간에 장기 동의를 위한 협상 테이블이 차려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원자력硏 뒤로 숨은 과기부, 파이로-SFR 연계 개발 계획은 어디로 갔나

그동안 파이로프로세싱은 고준위 방폐장 부지 면적을 대폭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로 널리 알려져 왔다. 줄어든 부지 면적만큼 부지확보도 쉬워질 테니 연구개발을 지속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게 원자력연구원의 논리다.

하지만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에서 추출한 핵물질을 소듐냉각고속로(SFR)나 용융염원자로(MSR)에서 소각해야만 원자력연구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부피 저감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현재 과기부와 원자력연구원이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파이로프로세싱뿐이다. 원자력계 관계자는 "지난해 말 제10차 원자력진흥위원회는 '파이로프로세싱 및 SFR 연구개발사업을 함께 지속'할 것을 의결했다"며 "당시 미래원자력시스템 장기추진계획을 수정·보완하기로 했는데 현재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파이로프로세싱과 SFR은 하나의 세트처럼 묶여 핵연료를 재활용함으로써 원자력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고, 부수적으로는 고준위 방폐물의 발생량을 줄인다는 목적으로 그동안 추진돼 왔다"며 "만약 이런 전제가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과기부는 지금이라도 핵연료주기 로드맵을 따로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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